아빠였던 시절 생계에 매달려 아이 곁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이 할아버지가 돼서야 비로소 육아의 주인공이 됐다. 고양특례시의 김정백씨가 손녀 황시엘양을 무릎에 앉히고 그네를 타며 환히 웃고 있다. 수원특례시의 조평호씨가 품에 안긴 손녀 서지민양을 보듬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주현
기저귀는 처음이고, 이유식은 낯설다. 어릴 적 내 아이를 안아본 기억도 없건만 지금은 아들의 아들, 딸의 딸을 품는다. 마지막 가부장 세대인 오늘날의 조부모들이 이제는 유모차를 밀고, 분유를 타고, 재롱에 웃는다. ‘여자라서’ 당연히 양육을 도맡았던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자라서’ 생계를 책임지며 양육에 멀어졌던 할아버지들이 주인공이다. 묵묵하고 따뜻한 할아버지들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전한다.
아빠였던 시절 생계에 매달려 아이 곁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들이 할아버지가 돼서야 비로소 육아의 주인공이 됐다. 고양특례시의 김정백씨와 손녀 황시엘양의 모습. 조주현
“내 딸에게 못 해준 육아, 이젠 딸의 딸에게 해줍니다.”
저녁식사 시간을 앞둔 오후 수원특례시 송죽동의 한 김밥집 앞에서 작은 소녀가 춤을 추며 재롱을 부렸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손녀 서지민양을 마중 나온 외할아버지 조평호씨는 그 모습을 보고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목조주택
야간에서 주간으로 이어진 근무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는 할아버지의 기능성 티셔츠를 ‘수영복’이라고 놀리는 귀여운 장난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소소한 행복을 선물했다.
조씨는 딸의 바깥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손녀가 7개월이 됐을 때부터 살림을 합쳤다. 매일 아침 7시 온 가족이 일어나 밥을 먹고, 지민이가 유치원에 간 후에는 각자의 일상을 보낸다.
지민이의 일과는 할아버지를 향한 애착으로 가득하다. 조씨는 “지민이는 볼일을 보고 난 후에도, 잠을 잘 때도 할아버지 손을 찾는다”며 동네에서 제일 가는 ‘할아버지 껌딱지’ 손녀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지민이는 왼손에 할아버지 손을, 오른손에는 애착 인형 ‘패티’의 코를 쥐어야만 잠이 든다고 한다.
한평생 농수산물 시장에서 경매 일을 했던 조씨는 딸을 키우는 내내 육아를 아내에게만 맡겼던 미안함이 있었다. 그래서 ‘딸의 딸’ 지민이에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요리는 아내가 전담하되 조씨는 잠 재우기, 기저귀 갈기, 분유 먹이기 등 나머지 육아를 책임졌다. 조씨는 “지민이가 그저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줬으면 좋겠다”며 “고맙고 또 고맙다”는 말로 손녀를 향한 마음을 전했다.
또 다른 ‘할아버지’도 있다. 고양특례시에 사는 김정백씨도 평일 오전 9시마다 14개월 된 손녀 황시엘양을 만난다. 그의 하루 중 가장 신나는 순간이다. 김 씨는 최근 손녀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육아 ‘방학’을 맞기 전까지는 손녀의 ‘전담 주 양육자’였다.
정작 딸을 키울 때는 생계에 몰두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는 그는 “이제야 작은 보물 같은 손녀를 통해 진짜 육아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딸이 “너무 수고스럽다”며 만류하지만, 김씨에게 시엘양은 세상이자 미래다. 그는 손녀를 제대로 돌보기 위해 지역 센터의 육아 교육까지 직접 신청해 듣는 열혈 ‘할빠’를 자처한다. 수강생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는 “옛날 방식만 고집해서는 요즘 아이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며 “나부터 배우고 바뀌어야 손녀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작은 손녀가 첫걸음을 떼듯, 이들도 손녀와 함께 새로운 ‘육아의 길’을 걷고 있다.
김정백씨가 손녀 황시엘양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있다. 조주현
자녀가 있는 가구의 절반 이상이 맞벌이인 현실에서 돌봄 역할이 조부모에게 넘어가고 있다. 이 중 10%가량이 ‘할아버지’다.
과거 전통적 가부장 문화 속에서 자녀 양육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중노년 남성들이 양육에 처음 뛰어들게 되면서 이들이 한층 적극적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개선과 지원 교육 등이 요구된다.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전제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국내 맞벌이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20%대에 머물렀다. 여성 경제활동참가율도 1990년 47% 수준으로, 사실상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는 ‘결혼 퇴직’ 관행이 일반적이었다.
한정승인신문공고
당시 평균 결혼 연령은 여성 24세, 남성 27세다. 자녀 수도 ‘기본적으로’ 1.5명 이상이었고,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이 출산·양육 문화 전반에 강하게 작용했다.
미디어 속 인기 요인 역시 현재와 달랐다. TV 예능이나 드라마에서는 ‘일만 하는 아버지’와 ‘집안을 지키는 어머니’ 구도가 반복됐고, 그 반대의 케이스는 오히려 희화화 됐다. 육아에 참여하는 남성상은 예외적이었기에, ‘능숙한 엄마’와 ‘철없는 아빠’의 대비가 코미디 소재가 되곤 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맞벌이 가구 비율은 증가하기 시작했다. 통계청의 ‘2024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맞벌이 가구 및 1인 가구 취업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유배우 가구 1천267만3천 가구 중 맞벌이 가구는 608만6천 가구로 집계됐다. 30여 년 만에 20%포인트 정도가 뛴 것이다.
지역별로는 경기도 맞벌이 부부가 가장 많았고, 이어 ▲서울 ▲경남 ▲경북 ▲부산 ▲인천 순이다. 최근 전국적으로 맞벌이 부부는 감소세를 그리고 있지만 인천 만큼은 2020년부터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세 미만 자녀가 있는 전국 유배우 가구에선 절반이 넘는 58.5%가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이는 전년 대비 1.7%포인트 증가한 수준이다.
막내자녀 연령별로 보면 맞벌이 가구는 ‘7~12세’ 87만 가구, ‘6세 이하’ 76만5천 가구, ‘13~17세’ 66만8천 가구 순으로 많았다. 이 지표는 자녀들의 나이가 높아질수록 맞벌이 부부의 ‘비중’이 높아진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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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54%를 넘어서면서, ‘독박 가사·육아’에서 벗어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 돌봄은 조부모에 의존…“믿을 수 있어서”, “혼자는 힘들어서”
그만큼 제도적 기반도 확장됐다. 2001년 육아휴직으로 인한 급여 제도가 남성에게까지 전면 확대됐고, 2014년부터는 ‘아빠의 달’ 제도가 도입되며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점차 늘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남성 육아휴직자 수는 3만 명을 넘어 10년 새 7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공공부문에 편중돼 있고, 자영업자·비정규직 근로자에겐 제도 접근성이 낮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그나마 아이들이 크면 별다른 돌봄 활동이 필요 없지만, 그렇지 않은 맞벌이 가구 상당수는 ‘돌봄 지원’이 절실하다. 등하원도우미나 베이비시터를 고용하고, 소위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부분은 ‘조부모’에게 의존하는 편이다. 경제적 여유를 떠나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대상이 아이들의 할아버지·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전반기 베이비붐 세대들이 딱 그러한 ‘황혼 육아’ 연령대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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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가족재단이 낸 '서울시 여성가족 정책 리뷰'의 일부 내용 발췌
서울여성가족재단이 지난 1월 발표한 ‘서울시 여성가족 정책 리뷰’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확인된다. 이 안에는 ‘서울형 아이돌봄비 사업’에 참여하는 가정 가운데 손주를 돌보는 대상이 외할머니,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라는 내용이 담겼다. 손주 육아를 하는 조부모 10명 중 1명이 ‘할아버지’라는 의미다.
조부모에게 자녀의 돌봄을 부탁한 이유는 ▲아이돌보미는 믿음이 가지 않기 때문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기 때문 ▲혼자 육아하기 힘들기 때문 등이 꼽혔다.
이와 함께 지난 5월 서울시의 조사에서도 서울형 아이돌봄비를 신청한 가정 10곳 중 9곳 이상이 ‘조부모’가 돌봄 수행 당사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외조부모, 친조부모 사이 대부분은 ‘60대’의 ‘여성’이라는 분석이다.
서울권의 이 조사들을 제외하면 ‘조부모 돌봄’에 대한 별다른 현황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나마 경기도는 생후 24~36개월 아동을 돌보는 조부모나 친인척·이웃에게 월 30만원을 지원하는 ‘경기형 가족돌봄수당’ 사업을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조부모가 돌봄조력자로 신청한 사례는 지난해 하반기 3천738명, 올해 상반기 3천37명으로 매년 3천명 이상 집계되고 있다. 조부와 조모를 구분한 통계는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서울과 비슷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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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손주 육아에 나서는 60~70대 남성들은 한국 사회에서 ‘마지막 가부장 세대’로 불린다. 이들은 젊은 시절 가정 생계 책임을 전담했고, 실제 육아 경험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맞벌이 확산과 핵가족화로 ‘조부모 돌봄’ 수요가 늘어나면서, 과거의 거리감이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남성 중심의 생계 부양, 여성 중심의 자녀 돌봄이 명확히 구분됐던 과거 인식은 오늘날 통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육아 참여’는 ‘어울리지 않는 일’로 여겨졌고, 그때 그 아버지들이 현재의 할아버지가 된 만큼 여전히 ‘어머니’의 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현재 ‘생활시간조사’ 결과를 보면 65세 이상 남성의 ‘손자녀 돌봄 시간’은 2010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대도시·수도권에서 그 비중이 높았다.
손주를 키우는 할아버지들의 등장은 세대 간 인식 변화를 상징한다. 부모 세대는 경제활동 지속을 위해 ‘돌봄 외주화’를 선택하고, 조부모 세대는 이를 ‘가족의 역할’로 받아들인다. 과거엔 할머니 중심이던 조부모 육아에서, 이제는 성별 구분 없는 ‘돌봄 주체’ 개념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다만 시대가 변하고 있기에 인식 개선도 요구된다. 저출생의 요인 중 하나가 ‘양육 부담’이고, 그 부담을 ‘조부모’가 짊어진 상황에서 공공 보육·방과후 지원 확대 등의 병행도 더해져야 한다.
임영주 부모교육연구소 대표는 “조부모는 한국 사회 가족 구조와 성 역할 변화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중요한 양육 주체”라면서 “다만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실태 조사나 기초 자료는 다소 부족한 상황이며, 이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시절 육아 경험이 전무했던 할아버지들의 육아 참여가 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할 때 양육 수당 지급 같은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새로운 양육 주체인 이들이 정서적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균형 잡힌 정서적 지원도 제도적으로 더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